여행이 끝난 뒤에야, 그 도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33일간의 유럽배낭여행, 그 1년 후
2025년 여름, 30년 지기 친구와 유럽을 다녀왔다.
1년 뒤 사진첩을 다시 열었다.
바쁜 배낭여행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음 도시로 향하느라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사진 속에서 뒤늦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시작해서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지나고, 알프스를 넘어 중부유럽으로 갔다. 프라하에서 비행기를 타고 리스본으로 넘어갔고, 포르투를 지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까지 갔다.
33일.
8개국.
20여개의 도시.
그때는 꽤 많은 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진도 많이 남아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있고, 피렌체의 거대한 돔도,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베네치아도.
알프스의 산과 호수, 부다페스트의 밤, 빈의 궁전, 프라하의 오래된 거리, 포르투의 석양도 사진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사진을 넘기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이곳들을 다녀왔고, 많은 것을 봤다. 그런데 정작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사진은 1년 전부터 남아 있었고, 질문은 1년이 지나 도착했다.
콜로세움 사진 앞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여행할 때는 너무 유명한 곳이라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다른 게 궁금했다.
저 건물은 어떻게 2천 년 가까운 시간을 버틴 걸까?
20년도 아닌,
200년도 아닌,
2000년을...
베네치아는 더 이상했다.
운하와 골목마다 카메라를 드느라 바빴는데, 지금 사진을 보면서 다시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저 무거운 건물들은 대체 어떻게 물 위에 서 있는 걸까?
피렌체의 두오모를 보면서는,
600년 전 사람들은 크레인도 컴퓨터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저 거대한 돔을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저 위에 올렸지?
올린 게 아닌가? 그 자리에 그냥 만든건가? 저렇게 큰 돔의 맨 윗 부분은 어떻게 만든걸까?
스위스에서는 조금 달랐다. 뭐를 질문할 생각도 전에 산과 호수 앞에서 웅장함에 먼저 압도당해 버렸다.
독일의 잉글리시 가든에서의 수요일 오후 4시 30분의 광경은 내 인생의 충격이었다.
프라하의 오래된 거리를 다시 보면서는 '체르니는 왜 프로이트를 저 곳에 메달아 놓아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수많은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 왜 어떤 도시는 옛 모습을 많이 남겼고,
어떤 도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는지가 궁금해졌다.
사진 속 풍경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나의 질문이었다.
많이 봤지만, 오래 보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당시 여행에서는 질문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다음 기차,
다음 숙소,
다음 볼것,
다음 먹거리,
내일 가야 할 도시가 있었다.
유럽 한 달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꽤 촘촘한 일정을 만들었다. 내 친구놈은 20대때 해보지 못했던 그런 배낭여행이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체력적인 준비가 안되어 있는 나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아침에 도시를 떠나고, 낮에는 다른 도시를 걷고, 저녁에는 또 기차를 타야하는 날도 있었다.
많이 보고 싶었다.
가능하면 하나라도 더 보고 싶었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이런 여행 방식을 후회하진 않는다.
아마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동안 가보지 못했을 도시도 많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서로 다른 도시들을 연이어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비교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문제는 많이 본 것이 아니었다.
많이 봤다는 이유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1년이 지나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기차 시간과 호텔 예약은 기록에 정확하게 남아 있는데, 그날 뭐를 배웠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상당 부분 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많은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기억이란 놈의 소매자락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에 이 여행을 다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기억이 흐려진 그 자리에서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행기를 기억에 의존해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때 정말 감동했다.”
“이곳은 내 인생 최고의 장소였다.”
기억나지 않는 감정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것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진.
기차표.
비행기 예약.
숙소 기록들.
그리고 다음 기차도, 다음 숙소도, 다음 먹거리도 없는 지금,
그때는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이야기를 다시 찾아볼 시간이 생겼다.
당시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질문을 품고, 사진 속에 남겨둔 그 도시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 보려 한다.
어떤 도시는 이제 다른 질문을 남긴다
사진들을 계속 넘기면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도시마다 떠오르는 질문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도시에서는 오래된 건물이 궁금했고,
어떤 도시에서는 그 도시를 만든 왕과 제국이 궁금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험한 자연 속에 마을을 만들었는지가 궁금했고,
어떤 곳에서는 왜 이 왕궁에는 방이 1600개나 있어야 했는지가 궁금했다.
몇몇 사진 앞에서는 질문의 종류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다시 가보고 싶은가?
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어떤 도시는 왜 여행이 끝난 뒤에도 내 삶에 계속 질문을 보내오는 걸까.
여행 당시에는 바빠서 깊이 던지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번 블로그를 쓰면서 그 질문을 끝까지 한번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번 여행기는 그래서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갈 것 같다.
맛집을 몇 군데 갔는지,
어느 호텔이 좋았는지,
몇 시에 어느 관광지를 방문해야 사진이 잘 나오는지를 정리하는 여행기는 아닐 것이다.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해서 그 사진 뒤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찾아가는 글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왜 로마의 폐허는 아직 도시 한복판에 남아 있을까.
베네치아라는 도시는 애초에 어떻게 물 위에 만들어졌을까.
유럽의 왕과 제국은 지금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도시들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
그리고 결국,
여행자로 사랑했던 도시를 삶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도, 나는 같은 마음으로 그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직 나도 답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첫 번째 질문은 로마에 있었다
사진첩의 맨 앞쪽으로 돌아갔다.
2025년 7월.
유럽에서 처음 도착한 도시는 로마였다.
나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쿠알라룸푸르, 카타르를 거쳐서, 친구놈은 서울에서 출발해서 직항으로 로마로 왔다.
사진을 넘기다가 아주 익숙한 건물 앞에서 다시 멈췄다.
콜로세움.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 가운데 하나를 드디어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2천 년 전에 만든 저 거대한 건물은, 왜 여전히 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걸까.
나의 작은 인생이 남긴 산들바람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르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1년 뒤 다시 시작한 유럽 여행의 첫 번째 질문은 여기서 시작하고자 한다.

